수첩과 엑셀에 흩어져 있던 비밀번호, 관리 도구 하나로 옮기기까지
왜 미루던 일을 그날 시작했나
거래처에서 계정 정보 유출 안내 메일을 받은 날이 있습니다. 저희가 쓰던 서비스 하나에서 고객 정보가 새어 나갔으니 비밀번호를 바꾸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바꾸려고 자리에 앉았다가 손이 멈췄습니다. 그 비밀번호를 다른 어디에 또 쓰고 있는지, 제가 대답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희 비밀번호 관리 상태는 이랬습니다. 제 수첩에 일부, 사무실 공용 엑셀 파일에 일부, 각자 브라우저 저장에 일부, 그리고 모니터 옆 포스트잇에도 몇 개. 여러 법인의 은행, 국세청, 4대보험, 카드사, 거래처 시스템 계정을 이 상태로 굴리고 있었습니다.
이 글은 그 상태에서 비밀번호 관리 도구로 옮겨가는 데 실제로 무엇이 걸렸는지의 기록입니다. 도구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걸린 것은 대부분 옮기는 과정과 사람이었습니다.

옮기기 전에 목록부터 만들었는데, 여기서 이미 사고가 보였습니다
도구를 고르기 전에 지금 계정이 몇 개인지부터 세어봤습니다. 수첩, 엑셀, 브라우저 저장, 포스트잇, 메일함 검색까지 뒤져서 목록을 만드는 데 이틀이 걸렸고, 나온 숫자는 예상의 두 배가 넘었습니다.
목록을 만들면서 드러난 상태가 이랬습니다.
- 같은 비밀번호가 수십 개 계정에 걸쳐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유출 안내를 받은 그 비밀번호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 퇴사한 직원이 만들었고 지금 아무도 접속 방법을 모르는 계정이 여러 개 나왔습니다.
- 공용 엑셀 파일의 비밀번호 절반쯤은 이미 낡아서 틀린 값이었습니다. 누군가 바꾸고 파일은 안 고친 겁니다.
- 브라우저 저장 비밀번호는 그 PC를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설정 화면에서 볼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즉 유출 사고가 나기 전부터 이미 관리는 무너져 있었고, 유출 안내는 그걸 들여다보게 만든 계기였을 뿐입니다.

실제로 걸린 것들
관리 도구 도입 자체는 검색하면 나오는 그대로라 적을 게 없습니다. 대신 어디서 시간이 들고 어디서 막혔는지를 적습니다.
옮기는 작업은 반나절이 아니라 삼 주였습니다
계정을 도구에 넣는 단순 입력은 금방입니다. 시간이 든 것은 넣으면서 계정마다 해야 했던 판단입니다. 이 계정이 아직 필요한가, 담당이 누구인가, 비밀번호를 지금 바꿀 것인가. 결국 이 작업은 비밀번호 이전이 아니라 계정 전수조사가 됐고, 하루에 조금씩 삼 주에 걸쳐 끝냈습니다.
돌아보면 이게 맞는 순서였습니다. 무너진 목록을 그대로 옮기면 무너진 상태가 도구 안으로 이사할 뿐입니다.
삼 주 동안 옮기는 순서에도 기준을 뒀습니다. 돈이 직접 오가는 계정부터였습니다. 은행, 국세청, 카드사, 4대보험을 첫 주에 끝내고, 거래처 시스템과 구매 계정을 둘째 주에, 나머지 잡다한 서비스들을 마지막에 처리했습니다. 도중에 흐지부지되더라도 중요한 것부터 옮겨져 있게 하려는 순서였는데, 실제로 마지막 주는 진도가 확연히 느렸으니 이 순서를 잡아둔 게 다행이었습니다.
공용 계정이라는 회색지대가 제일 어려웠습니다
개인 계정은 각자 옮기면 끝인데, 여러 사람이 같이 쓰는 계정이 문제였습니다. 은행 조회용, 택배 발송, 사무용품 구매 같은 계정들입니다. 이건 도구의 공유 기능으로 필요한 사람에게만 나눠주는 것으로 정리했지만, 누구에게까지 줄 것인가를 정하는 데 도구가 해주는 일은 없습니다. 계정마다 담당자와 열람 범위를 정하는 회의를 따로 했습니다.
공유 방식이 바뀌면서 좋아진 점이 하나 있습니다. 예전 공용 엑셀은 파일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모든 계정을 다 보는 구조였는데, 도구에서는 계정 단위로 줄 수 있으니 택배 계정만 쓰는 사람이 은행 계정 정보까지 볼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직원이 바뀔 때 할 일이 명확해졌습니다. 그 사람에게 공유된 계정 목록을 열어 회수하고, 그 계정들의 비밀번호를 바꾸면 끝입니다. 엑셀 시절에는 퇴사자가 무엇을 알고 나갔는지 목록조차 없었습니다.
결재를 받을 때는 출입 카드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예전 공용 엑셀은 사무실 열쇠 하나로 모든 방을 다 여는 상태였고, 지금은 직원마다 필요한 방만 열리는 카드를 발급하는 방식이라고 하니 결재가 빨리 났습니다.
도구 자체의 마스터 비밀번호가 새로운 급소가 됐습니다
모든 비밀번호를 한 곳에 모으면, 그 한 곳의 열쇠가 전체의 급소가 됩니다. 마스터 비밀번호를 잊으면 전부 잠기고, 새면 전부 새는 구조입니다. 이 부분은 두 가지로 대비했습니다. 마스터 비밀번호는 길게 만들어 종이에 적어 사무실 금고에 넣었고, 도구의 2단계 인증을 켰습니다. 종이가 구식으로 보여도, 온라인으로 새지 않는 저장 수단이라는 점에서는 금고 속 종이가 가장 단단한 편입니다.
공동인증서는 이 체계 밖에 남았습니다
재무 실무라 은행과 국세청 접속의 상당수는 비밀번호가 아니라 공동인증서로 이뤄집니다. 관리 도구는 인증서 파일까지 대신 보관해주지 않으니, 이 부분은 별도로 정리해야 했습니다. 어느 PC에 어느 법인의 인증서가 들어 있는지, 갱신일이 언제인지를 표로 만들었고, 인증서 비밀번호만 관리 도구에 넣었습니다. 인증서 갱신일을 놓쳐서 이체가 급한 날 아침에 갱신부터 하던 일이 그동안 몇 번 있었는데, 갱신일 표를 만든 뒤로는 만료 전에 처리하고 있습니다. 도구 하나로 전부 덮이지 않는 영역이 있다는 것도 이번에 정리하며 확인한 사실입니다.
법인마다 걸린 시간이 달랐던 이유
4개 법인 중 먼저 정리를 마친 법인의 방식을 나머지 법인에 그대로 옮기려다 한 번 멈췄습니다. 법인마다 계정을 쓰는 인원 수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담당자가 혼자인 법인은 공유 기능을 쓸 일이 거의 없어서 개인 계정처럼 옮기면 끝났지만, 여러 명이 같은 계정을 나눠 쓰는 법인은 공유 범위를 정하는 회의부터 다시 해야 했습니다. 계정 수가 비슷해 보여도 걸리는 시간은 인원 구조에 따라 갈렸습니다.
또 하나 확인한 조건은 공동인증서 사용 빈도입니다. 인증서 의존도가 높은 법인은 표를 따로 만드는 작업까지 포함해야 하니 전환에 며칠이 더 들었고, 인증서보다 아이디 비밀번호 로그인이 많은 법인은 상대적으로 빨리 끝났습니다. 옮기기 전에 이 두 가지, 계정을 쓰는 인원 수와 인증서 의존도를 먼저 확인해두면 예상 소요 시간을 훨씬 정확하게 잡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제일 오래 걸렸습니다
도구를 깔고도 몇 주 동안, 급하면 예전 습관대로 포스트잇과 엑셀로 돌아가는 일이 반복됐습니다. 전환이 실제로 끝난 것은 예전 경로를 없앤 뒤였습니다. 공용 엑셀 파일을 잠그고, 포스트잇을 걷고, 브라우저 저장 비밀번호를 지웠습니다. 새 길을 만드는 것보다 옛길을 막는 쪽이 습관에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옛길을 막자 불편도 하나 따라왔습니다. 도구에 로그인한 상태를 유지하지 않는 공용 PC에서는 계정을 열 때마다 마스터 비밀번호를 다시 입력해야 하는데, 예전에는 브라우저가 자동으로 채워주던 로그인 정보를 이제는 매번 도구를 열어 복사해서 붙여넣습니다. 보안은 나아졌지만 자동 로그인 몇 초가 없어진 자리는 그대로 체감이 됩니다. 보안과 맞바꾼 몇 초라고 여기고 있지만, 도입 전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라 적어둡니다.
유출 안내를 받았던 그 계정의 뒷정리
시작점이었던 유출 건도 마무리를 적어둡니다. 같은 비밀번호를 쓰던 계정을 목록에서 전부 찾아 바꿨습니다. 목록이 없던 시절이면 어디를 바꿔야 하는지조차 몰랐을 일입니다.
이후로는 개인정보 유출 안내를 받으면 확인하는 순서를 정해뒀습니다. 해당 계정 비밀번호 변경, 같은 비밀번호를 쓰던 계정 확인, 그리고 유출 통지 내용의 보관입니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와 한국인터넷진흥원이 운영하는 털린 내 정보 찾기 서비스에서 계정 정보가 유출 이력에 있는지 확인해볼 수 있다는 것도 이 과정에서 알았습니다.

비밀번호 관리 전환에서 남긴 다섯 가지
- 비밀번호 관리 전환의 실작업은 도구 설치가 아니라 계정 전수조사입니다. 이 판단 작업을 건너뛰면 무너진 목록이 자리만 옮깁니다.
- 같은 비밀번호의 재사용이 가장 큰 위험이었습니다. 유출은 서비스 쪽 사정이라 막을 수 없지만, 한 곳의 유출이 전체로 번지는 건 재사용이 만드는 문제입니다.
- 공용 계정은 도구가 아니라 규칙의 문제입니다. 누가 담당이고 누구까지 열람하는지는 사람이 정해야 합니다.
- 마스터 비밀번호와 2단계 인증, 그리고 오프라인 보관까지가 한 세트입니다. 모으는 구조는 편리한 만큼 급소도 한 곳에 모입니다.
- 전환은 새 도구를 들이는 날이 아니라 옛 경로를 막는 날 끝납니다.
계정을 만들 때마다 한 단계가 늘었습니다
도구가 일을 덜어주기만 한 건 아닙니다. 계정을 새로 만들 때마다 도구에 등록하는 절차가 한 단계 늘었습니다. 예전에는 계정을 만들고 아무 데나 적어두면 끝이었는데, 이제는 만든 직후에 도구를 열어 등록해야 합니다. 이 등록을 미루면 결국 목록이 또 무너지기 시작한다는 걸 이번 정리 과정에서 이미 봤기 때문에, 계정 생성과 도구 등록을 한 번에 끝내는 순서로 정해뒀습니다.
체감으로는 계정 하나를 등록하는 데 드는 시간이 예전에 수첩이나 엑셀에 적던 시간과 비슷했습니다. 다만 등록해두면 나중에 찾는 시간이 확실히 줄어드니, 늘어난 절차 하나는 남는 장사였습니다. 이 판단이 맞았다는 걸 확인한 계기도 있었는데, 등록을 미뤘던 계정 하나를 나중에 찾다가 결국 어디에도 안 적혀 있다는 걸 알고 그 자리에서 바로 등록했던 일입니다.
포스트잇이 사라진 모니터 옆이 아직도 가끔 허전합니다. 다만 유출 안내 메일을 받아도 어디를 바꾸면 되는지 몇 분 안에 답할 수 있는 지금 상태가, 그 허전함과 바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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