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일 자동분류를 걸었다가 세금계산서 메일을 놓칠 뻔했습니다
규칙 열일곱 개를 만들었고, 결국 네 개만 남겼습니다
메일함 정리를 자동화해보겠다고 분류 규칙을 열일곱 개까지 만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폴더 이동 규칙은 네 개입니다. 나머지 열세 개는 몇 달에 걸쳐 하나씩 지웠고, 그중 하나는 거래처의 세금계산서 메일을 안 보이는 폴더로 치워버려서 하마터면 매입 처리를 놓칠 뻔한 뒤에 지웠습니다.
이 글은 그 규칙들이 왜 하나씩 무너졌는지, 그리고 무엇이 살아남았는지의 기록입니다. 저는 여러 법인의 재무 실무를 보는 사람이라 메일함에는 세금계산서, 카드사와 은행 안내, 거래처 문서, 각종 광고가 뒤섞여 들어옵니다. 하루에 쌓이는 양이 많으니 자동분류는 당연히 해볼 만한 시도였습니다. 다만 지금 와서 보면, 시도 자체보다 규칙을 지우는 판단이 훨씬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처음의 설계: 받은편지함을 비우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시작할 때의 그림은 단순했습니다. 받은편지함에는 사람이 판단할 메일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폴더로 갈라 넣는 것입니다.
- 법인별 폴더 네 개: 보낸 주소와 제목의 법인명 키워드로 분류
- 세금계산서 폴더: 제목에 세금계산서가 들어가면 이동
- 은행, 카드 안내 폴더: 금융기관 도메인이면 이동
- 광고 폴더: 광고 표기가 있으면 이동
- 그 외 뉴스레터, 시스템 알림 등 잡다한 규칙들
만들고 첫 주는 만족스러웠습니다. 받은편지함이 하루 종일 거의 비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비어 있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가 잘못 읽고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첫 번째 균열: 분류가 잘될수록 안 보게 됩니다
폴더로 나뉜 메일은 읽으러 들어가야 읽힙니다. 처음 몇 주는 폴더를 순회하며 읽었는데, 한 달쯤 지나자 순회가 끊겼습니다. 받은편지함이 비어 있으니 처리할 일이 없다고 뇌가 판단해버리는 겁니다.
자동분류는 메일을 정리해준 게 아니라 안 읽어도 되는 곳으로 옮겨주고 있었습니다. 정리와 은폐는 화면상으로 구분이 안 됩니다. 이때부터 폴더마다 안 읽은 메일 수가 세 자리로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 균열: 규칙은 예외를 모릅니다
사고는 세금계산서 규칙에서 났습니다. 어느 달 마감 때 매입 세금계산서 하나가 국세청 조회에는 있는데 제 기억에 없었습니다. 뒤져보니 그 메일은 세금계산서 폴더가 아니라 광고 폴더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원인은 이랬습니다. 그 거래처가 발송 대행 서비스를 바꾸면서 메일 하단에 수신거부 문구가 들어갔고, 제 광고 규칙이 그 문구를 잡아서 광고로 분류한 겁니다. 규칙 두 개가 겹칠 때 어느 쪽이 이기는지를 저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결과는 광고 쪽이 이기고 있었습니다.
이때 등골이 서늘했던 건 놓칠 뻔한 그 한 건이 아니라, 이런 오분류가 그동안 얼마나 있었는지 알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오분류는 오류 메시지를 내지 않습니다. 그냥 조용히 엉뚱한 폴더에 들어가 있을 뿐입니다.
광고 폴더 전수조사를 했습니다
그 주말에 광고 폴더에 쌓인 메일을 전부 훑었습니다. 수백 건 중에 업무 메일이 여러 건 나왔습니다. 거래처의 안내 메일, 서비스 요금 변경 통지, 그리고 계약 관련 회신 하나. 회신은 답장 시한이 지나 있었습니다. 상대방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수습이 되긴 했지만, 자동분류가 만든 사고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제 규칙이 만든 사고였습니다.
전수조사를 하면서 오분류의 유형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광고 표기나 수신거부 문구처럼 형식 요소를 잡는 규칙이 업무 메일까지 잘못 걸러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요즘은 거래처도 발송 대행 서비스로 메일을 보내는 일이 많아서, 겉모습만 보면 광고와 업무 메일의 구분이 생각보다 흐립니다. 보낸 쪽의 형식이 아니라 내용의 중요도를 판단해야 하는데, 그건 규칙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세 번째 균열: 규칙이 저보다 오래 삽니다
몇 달 지나면서 발견한 또 하나는, 규칙이 낡는다는 점입니다. 거래처가 메일 주소를 바꾸면 법인별 분류가 빗나갑니다. 은행이 안내 발송 도메인을 바꾸면 금융 규칙이 빗나갑니다. 세상은 계속 바뀌는데 규칙은 만든 날에 멈춰 있습니다.
빗나간 규칙은 스스로 알려오지 않으니, 규칙이 늘수록 낡았는지 점검할 대상만 늘어납니다. 열일곱 개 규칙을 유지한다는 건 열일곱 개의 낡을 수 있는 전제를 계속 감시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메일 정리 시간을 아끼려고 만든 체계가 체계 관리 시간을 새로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남긴 것: 옮기지 않고 표시만 합니다
전부 걷어내지는 않았습니다. 몇 달의 시행착오 끝에 남긴 원칙은 하나입니다. 자동화는 메일을 옮기지 않고 표시만 한다는 것입니다.
- 세금계산서, 금융기관, 법인별 구분은 폴더 이동 대신 색깔 범주 표시로 바꿨습니다. 메일은 받은편지함에 그대로 있고, 색으로 종류만 보입니다.
- 폴더로 실제 이동시키는 규칙은 네 개만 남겼습니다. 시스템 발신 자동 알림처럼, 놓쳐도 업무에 지장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들만입니다.
- 광고는 자동분류 대신 수신거부를 눌렀습니다. 광고 메일 정리의 정답은 분류가 아니라 차단이었습니다. 몇 주 꾸준히 누르니 유입 자체가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 세금계산서는 메일함을 믿지 않는 것으로 정리했습니다. 마감 때 국세청 홈택스 조회를 기준으로 삼고, 메일은 보조 수단으로만 씁니다. 발행된 세금계산서의 원본 대장은 어차피 국세청에 있습니다.
기준을 한 줄로 줄이면 이렇습니다. 놓치면 사고가 나는 메일은 자동화가 옮기게 두지 않습니다. 표시는 자동화가 하고, 이동은 사람이 합니다.
다른 팀에는 이보다 더 짧게 말합니다. 회의에서는 중요한 메일은 색으로 표시만 하고 놓쳐도 지장 없는 메일만 폴더로 옮기는 규칙 네 개가 남았다고만 말했습니다. 규칙이 왜 열일곱 개에서 네 개로 줄었는지 경과를 처음부터 설명하면 다들 흥미로워하긴 했지만, 정작 다른 사람이 궁금해하는 건 지금 뭐가 자동으로 되고 뭐가 안 되는지였고, 그 한 줄이면 충분했습니다.
걷어내는 과정도 순서가 있었습니다
열세 개 규칙을 하루에 다 지운 것은 아닙니다. 규칙을 끄면 그 규칙이 처리하던 메일이 받은편지함으로 쏟아지니, 한 번에 끄면 감당이 안 됩니다. 일주일에 두어 개씩, 규칙 하나를 끄고 며칠 지켜본 뒤 다음 것을 끄는 식으로 갔습니다.
끄기 전에 한 가지를 같이 했는데, 그 규칙이 지금까지 모아둔 폴더를 한 번 훑어 미처리 메일이 없는지 확인하는 일입니다. 규칙을 끄는 것은 앞으로의 문제를 막는 것이고, 폴더 안에는 지나간 문제가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과정에서 답을 안 한 메일이 두어 건 더 나왔습니다. 규칙 정리가 곧 밀린 메일 정리가 된 셈입니다.
메일함마다 출발점이 다릅니다
자기 메일함에도 해보겠다는 사람에게는 되묻는 게 있습니다. 메일함에 놓치면 사고로 이어지는 종류의 메일이 섞여 있는지가 첫 번째 기준입니다. 광고와 뉴스레터만 걸러내면 되는 메일함이라면 열일곱 개짜리 규칙을 짤 필요도 없고, 폴더 이동 규칙 몇 개로 충분합니다. 반대로 세금계산서나 계약 회신처럼 놓치면 되돌리기 어려운 메일이 섞여 있다면, 처음부터 이동이 아니라 표시로 시작하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동으로 시작해서 표시로 옮겨 오는 데 몇 달을 썼는데, 이 순서를 거꾸로 두면 그 몇 달을 건너뛸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물어보는 건 메일함을 혼자 쓰는지 여럿이 같이 보는지입니다. 저는 혼자 관리하는 메일함이라 규칙을 끄고 켜는 판단을 그때그때 저 혼자 내릴 수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같은 규칙 체계를 공유한다면, 규칙 하나를 끄기 전에 그 규칙에 기대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저 혼자 쓰는 구조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속도라는 점은 옮길 때 감안해야 하는 조건입니다.
받은편지함이 다시 붐비기 시작했습니다
규칙을 줄였다고 손이 완전히 빠진 건 아닙니다. 이동 규칙을 표시로 바꾸고 나서는, 색으로 표시된 메일이 받은편지함에 그대로 쌓이니 화면이 다시 붐빕니다. 예전에는 폴더가 알아서 치워줬던 것들을 이제는 눈으로 훑고 표시를 지우는 일을 제가 직접 해야 합니다. 정리된 느낌은 줄었는데, 놓치는 느낌도 같이 줄었으니 이 정도는 감수할 만하다고 지금은 생각합니다.
광고 폴더를 없애고 수신거부로 바꾼 뒤에는 다른 종류의 귀찮음이 생겼습니다. 수신거부 버튼을 누르는 몇 주 동안은 오히려 광고 메일을 눈으로 더 자주 마주쳐야 했습니다. 자동으로 치워지던 게 사라지니 당장은 불편함이 늘었고, 그 불편함이 줄어드는 데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받은편지함이 비었는지보다 놓친 메일이 없는지
- 자동분류의 성과는 받은편지함이 비었는지가 아니라 놓친 메일이 없는지로 재야 합니다. 앞의 것은 첫 주에 보이고 뒤의 것은 몇 달 뒤에 드러납니다.
- 규칙이 겹치면 어느 쪽이 이기는지 미리 따져봐야 합니다. 저는 광고 규칙이 세금계산서를 이기고 있다는 걸 사고가 나고서야 알았습니다.
- 오분류는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이동 규칙을 쓰는 동안에는 대상 폴더를 주기적으로 훑는 절차가 같이 있어야 합니다.
- 중요한 문서는 메일보다 원천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세금계산서의 원천은 메일함이 아니라 국세청 조회입니다.
받은편지함이 조금 수북한 지금이, 텅 비어 있던 그때보다 마음이 편합니다. 보이는 곳에 있는 미처리가, 안 보이는 곳의 미확인보다 훨씬 다루기 쉽습니다.
규칙을 열일곱 개까지 늘렸던 그 시절을 돌이켜 보면, 규칙 하나를 추가할 때마다 뭔가를 해결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게 문제였습니다. 실제로는 문제를 해결한 게 아니라 눈앞에서 치웠을 뿐인데, 그 둘을 구분하지 못한 채 규칙을 계속 쌓았습니다. 지금은 규칙을 늘리고 싶은 순간이 오면 한 번 더 묻습니다. 이게 문제를 없애는 규칙인지, 아니면 문제를 안 보이는 곳으로 옮기는 규칙인지를요.
이어서 읽을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