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상 노트 책상 노트
실무자가 실제로 굴려본 업무도구·업무 자동화 기록

업무인수인계서를 AI로 뽑았다가 결국 손으로 다시 썼습니다

읽는 시간 약 10분

막힌 건 양식이 아니라 제 머릿속에만 있던 것들이었습니다

담당 직원이 자리를 오래 비우게 되면서 인수인계서가 급히 필요해졌는데, 정작 네 개 법인 재무 실무를 보는 제 자리에는 인수인계서가 아예 없었습니다. 그 빈자리를 그날에서야 알았습니다.

그래서 AI에게 업무 기록을 주고 초안을 뽑아봤습니다. 두 시간 만에 그럴듯한 문서가 나왔지만 실제로는 쓸 수 없는 문서였고, 결국 손으로 다시 썼습니다.

AI 초안 두 시간, 막힌 세 지점, 최종본 네 장을 숫자로 정리한 도해

첫 시도: 업무 기록을 주고 AI에게 초안을 맡김

주간업무일지와 폴더 구조, 반복 일정 메모를 모아 AI에게 주고 인수인계서 초안을 만들게 했습니다. 나온 문서는 겉보기에 그럴듯했습니다. 업무 영역별로 항목이 나뉘어 있고, 각 항목에 설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문서를 처음 보는 사람의 눈으로 읽어보니 실행이 안 되는 문서였습니다.

  • 업무 이름은 있는데 시점이 없었습니다. 부가세 신고라는 항목은 있지만, 그게 언제 시작해서 어느 날까지 끝나야 하고 그 전에 무엇이 준비돼 있어야 하는지가 없었습니다.
  • 판단 기준이 없었습니다. 실무의 절반은 예외 처리인데, 문서에는 정상 경로만 있었습니다. 이 서류가 안 오면 누구에게 언제 연락하는지, 금액이 안 맞으면 어디부터 보는지가 빠져 있었습니다.
  • 기록에 없는 일은 통째로 없었습니다. 연 1회짜리 일들, 그리고 제가 기록 없이 머리로만 하던 일들입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AI는 기록을 요약해준 것이고, 인수인계에서 정말 위험한 부분은 기록이 안 된 부분이었습니다.

AI 버전과 손으로 쓴 버전, 무엇이 달랐나

AI 초안과 결국 손으로 다시 쓴 최종 문서를 항목별로 나란히 놓으면 차이가 분명해집니다.

항목AI가 뽑은 버전손으로 쓴 버전
시점 정보(마감일, 준비물)업무 이름은 있지만 시점이 없음. 부가세 신고가 언제 시작해서 언제까지 끝나야 하는지, 그 전에 무엇이 준비돼야 하는지가 빠져 있었음월간 달력에 날짜순으로 마감일, 준비물, 소요 시간을 적어 재구성
예외 상황 대응판단 기준이 없음. 정상 경로만 있고, 서류가 안 오거나 금액이 안 맞을 때 어디부터 봐야 하는지가 빠져 있었음예외 상황을 따로 목록으로 만들어 실제 대처법을 붙임. 문서 작성 중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린 부분
기록에 없는 업무 반영연 1회짜리 일과 기록 없이 머리로만 하던 일이 통째로 빠짐(AI는 기록을 요약했을 뿐)기억을 짜내 손으로 채워 넣음
문서의 뼈대(구성 단위)업무 영역별 분류로 구성돼, 읽는 사람이 머릿속에서 날짜순으로 다시 조립해야 함달력(날짜) 단위로 재구성해 재조립 부담을 없앰
실제 인수인계 시 검증 결과처음 보는 사람 눈으로 읽어보니 실행이 안 되는 문서로 판정됨업무를 모르는 직원에게 실행시켜본 결과 30분간 세 곳에서 막혔고, 그 지점을 보강한 뒤에야 완성으로 판정

이 표에 정리된 차이를 실제 문서에 반영하기까지는 한 단계를 더 거쳤습니다.

두 번째 시도: 양식을 받아서 채움

방향을 바꿔 통용되는 인수인계서 양식을 구해 칸을 채웠습니다. 담당업무 개요, 진행 중인 업무, 관련 문서 위치, 연락처. 칸은 다 채워졌는데, 채우고 나서도 이 문서를 받은 사람이 다음 달 10일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은 그대로였습니다. 양식이 업무를 종류별로 정리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수받은 사람이 실제로 사는 시간은 종류별이 아니라 날짜순입니다.

채우면서 걸린 데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진행 중인 업무라는 칸입니다. 재무 실무에서 진행 중이라는 상태는 문서로 고정되는 순간부터 낡기 시작합니다. 이번 주에 진행 중이던 건이 다음 주면 끝나 있고 새 건이 생겨 있습니다. 인수인계서에 스냅사진처럼 적어둔 진행 상황은 실제 인계 시점에는 이미 틀린 정보가 됩니다. 이 칸에 들어가야 할 것은 진행 중인 건의 목록이 아니라, 진행 중인 건이 어디에 기록되고 있는지였다는 걸 채우다가 알았습니다.

여기서 문서의 뼈대를 무엇으로 잡아야 하는지가 정리됐습니다.

AI 초안부터 달력 기반 재구성까지 네 단계를 보여주는 도해

복기: 인수인계서의 단위는 업무가 아니라 날짜였습니다

제 업무를 종이에 늘어놓고 보니, 실무의 대부분은 달력에 묶여 있었습니다. 매달 10일까지 원천세, 매달 말 세금계산서 마감, 분기마다 부가세, 매주 월요일 잔액 대조. 이걸 업무 영역별로 분류해서 설명하면 읽는 사람이 머릿속에서 다시 달력으로 재조립해야 합니다. 그 재조립을 문서가 대신해줘야 인수인계서입니다.

처음 방향을 잡을 때 순서도를 그려서 업무 흐름을 통째로 그림으로 남기는 방법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순서도는 흐름을 한눈에 보여주는 데는 좋지만, 그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바로 찾아 읽기에는 오히려 느렸습니다. 급하게 인수받은 사람이 필요한 건 흐름 이해가 아니라 오늘 할 일 확인이었기 때문에, 그림보다 날짜순 목록이 실제 쓰임에 맞았습니다.

그래서 최종 문서는 세 부분으로 다시 짰습니다.

  • 첫 부분은 월간 달력입니다. 한 달을 날짜순으로 내려가며 그날 해야 할 일, 마감일, 준비물, 소요 시간을 적었습니다. 연 단위 일정은 별도 표로 두고 해당 월에 표시했습니다.
  • 두 번째는 예외 상황 목록입니다. 자주 겪는 막힘을 상황별로 적고, 각각에 제가 실제로 했던 대처를 붙였습니다. 이 부분은 기록에 없어서 전부 기억을 짜내 손으로 썼고, 문서 전체에서 시간이 가장 오래 걸렸습니다.
  • 세 번째는 연락처와 접근 정보의 위치입니다. 비밀번호 자체는 문서에 적지 않고, 관리 도구의 어느 항목을 보면 되는지만 적었습니다.

달력 부분을 채우면서 재미있는 걸 겪었습니다. 제 업무를 날짜에 붙여 적다 보니, 날짜가 안 붙는 일이 남았습니다. 은행 서류 요청 대응, 대표 지시로 만드는 일회성 자료 같은 것들입니다. 처음에는 이걸 어디 넣을지 고민했는데, 결국 넣지 않기로 했습니다. 날짜가 없는 일은 발생하면 그때 판단하는 일이고, 인수인계서의 역할은 날짜가 정해진 일이 멈추지 않게 하는 데까지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문서에 다 담으려고 하면 문서가 두꺼워지고, 두꺼운 문서는 급한 날 안 읽힙니다. 최종본은 달력 두 장, 예외 목록 한 장 반, 위치 정보 반 장으로 네 장을 넘지 않게 잘랐습니다.

검증: 문서를 읽는 게 아니라 시켜봤습니다

문서를 다 쓰고 나서 한 가지를 더 했습니다. 그 업무를 모르는 직원에게 문서만 주고, 제가 옆에서 입을 닫은 채 월초 업무 하나를 처음부터 해보게 한 겁니다. 30분 동안 세 번 막혔습니다. 파일 위치를 폴더 이름까지만 적고 하위 폴더를 안 적은 곳, 사이트 이름을 줄임말로 적은 곳, 저에게는 당연해서 설명을 건너뛴 순서 하나였습니다.

세 군데를 보강하고 나서야 문서가 완성됐다고 판단했습니다. 인수인계서는 쓴 사람이 읽으면 항상 완벽해 보입니다. 빠진 부분은 쓴 사람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메워지기 때문입니다. 받는 사람이 실행해보기 전까지는 완성 여부를 알 수 없는 문서였습니다. 실행 테스트에 쓴 시간은 준비까지 한 시간이 안 됐는데, 문서 작성 전체에서 시간 대비 효과가 가장 컸던 구간이 이 한 시간이었습니다.

모든 자리에 달력이 맞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직원 자리에 같은 틀을 대보니 업무가 달력에 묶여 있는지부터 달랐습니다. 재무 실무는 신고와 마감이 대부분이라 날짜 단위 정리가 잘 맞았지만, 프로젝트 단위로 움직이는 업무는 마감일이 매번 달라서 월간 달력보다 진행 중인 프로젝트 목록으로 뼈대를 잡는 편이 나았습니다.

예외 목록의 분량도 사람마다 차이가 컸습니다. 예외 상황과 대처는 기록에 없는 부분이라 결국 본인이 기억을 짜내야 하는데, 그 자리를 오래 맡아온 사람일수록 예외가 많이 나오고 짧게 맡은 사람은 몇 줄 만에 끝났습니다. 짧게 맡은 자리는 예외 목록보다 월간 달력 쪽에 시간을 더 쓰는 게 맞았습니다.

AI 초안과 손으로 다시 쓴 문서의 구조를 비교한 도해

인수인계서를 네 장으로 자르며 남은 것

  • 정기 일정이 중심인 업무라면 인수인계서의 뼈대는 업무 분류가 아니라 달력으로 잡습니다. 받은 사람은 종류가 아니라 날짜를 삽니다.
  • AI 초안은 기록된 업무의 목차로만 씁니다. 인수인계에서 위험한 건 기록 안 된 부분이고, 그건 손으로 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 문서의 완성 판정은 읽기가 아니라 실행으로 합니다. 모르는 사람이 문서만 보고 한 번 해보게 하는 30분이, 문서를 열 번 다시 읽는 것보다 구멍을 많이 찾아냈습니다.
  • 한 번 만든 문서는 분기마다 달력 부분만 갱신합니다. 인수인계서는 퇴사 때 쓰는 문서가 아니라, 담당자가 갑자기 빠져도 업무가 서지 않게 하는 상비 문서라고 지금은 생각합니다.

함께 만든 다른 직원의 인수인계서에도 실행 검증을 적용했습니다. 본인이 초안을 쓰고, 제가 문서만 보고 그 직원 업무 하나를 해보는 교차 검증을 했습니다. 제 쪽에서도 두 군데가 막혔고, 막힌 자리를 보강했습니다. 이 교차 검증에는 부수입이 있었습니다. 서로의 업무를 문서로 한 번씩 밟아보니, 겹치는 일과 어느 쪽도 안 챙기고 있던 일이 한 건씩 나왔습니다. 인수인계서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업무 분장 점검이 된 셈입니다.

인수인계서는 보험과 닮았습니다. 평소에는 펼칠 일이 없고, 담당자가 갑자기 빠지는 그 순간에만 쓰입니다. 평소에 안 쓴다고 미뤄두면 정작 필요한 날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일을 하기 전에는 인수인계서를 문서 작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해보고 나니 이건 문서 작업이 아니라, 제 머릿속에만 있던 것을 밖으로 꺼내는 작업이었고, 꺼내지 못한 부분이 어디인지 확인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이어서 읽을 기록

책상 노트 운영자
함께 보면 좋은 글
error: Content is protected !!